주장.
청과는 사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파.
대의명분을 강조한 성리학자.
척화론의 주장.
1. 명과의 2백 년 넘게 쌓아온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
2. 임진왜란 때, 도와주었던 명나라와의 의를 버릴 수 없다.
3. 화친을 하더라도, 먼저 싸우고 난 뒤에 하자.
6. 성곽의 증축·수리는
무력반정을 일으킨다. 이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숭명배금의 외교정책을 펼친다. 한편 반정공신 중 한명인 이괄은 반정 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데(이괄의 난), 반란이 실패 한 후 청으로 도주해서 광해군이 억울하게 폐위되었다고 주장하여 청은 정묘호란의 명분을 가지게 된다.
최명길 등이 있는데, 그 중 최명길은 현실적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청나라와 화친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명분에 사로잡힌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적극적인 현실 인식과 실천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수용(受容)되어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주장은 청나라의 심기를 거슬러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병자호란의 결과로 청은 조선에 대해 강화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간다. 조선왕조의 명분이 추락한 것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청
조선 왕실은 강화도로 피난
후금에서 ‘형제관계’를 요구하고 조선 왕실이
몇몇 조건을 내걸며 이를 수용하면서 종결(정묘조약)
김상헌은 막무가내 척화론자가 아님
- 1627년 정묘호란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함
고려시대 서희의 외교적 노력과 비교
- 최명길의 주장은 화